'아키에이지' 리뷰 -3-
아키에이지는 지역별 특성과 기후, 식생 등이 아주 뚜렷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서대륙의 경우엔 수도 '마리아노플'이 우뚝 선 중세 고딕 풍 성과 첨탑이 들어서 있으며 빈 공간을 벽돌집이 채우는 형태다.
중앙 광장엔 석상이 들어서 있고 외곽엔 국왕의 가신들이 사는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등 유저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종의 스토리를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마리아노플 북부엔 마치 한강과도 같이 지역을 가로지르는 강이 존재하고 그 강을 중심으로 한 마을과 주거지역이 들어서 있어서 개발진들이 마구잡이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양식에 대한 기본 이상의 고려가 포함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키에이지 만의 특징으로 마리아노플에 있는 '감옥' 시스템을 꼽을 수 있는데, 겉보기엔 그렇게 커 보이지 않지만 지하에도 공간이 있는 구조로, 바로 왼쪽엔 군사 관련 시설과 오른쪽엔 딱 봐도 치안이 나빠 보이는 빈민촌이 함께하고 있어 몰입감을 더한다.
이 감옥은 실제로 유저들이 범죄점수와 불명예 점수를 많이 쌓을수록 빈번하게 더 긴 시간 동안 머물게 되는 곳인데, 단순히 남이 심어놓은 농작물을 서리하는 경범죄부터 시작해서 살인에 이르는 중범죄까지 모든 악행이 해당된다.
범죄점수가 일정 기준을 넘은 유저가 사망하게 되면 자동으로 재판장으로 끌려오게 되고, 불명예 점수가 아주 낮은 모범적인 플레이어 5명이 무작위로 배심원에 선정되어 참여하게 된다.
자유롭게 심문하고 변호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이 모든 과정은 채팅창에 공공연히 드러나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마디 거들 수도 있다.
이 시스템은 서비스 초반부터 존재했는데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잘 운영되어 온 것을 보면, 단순히 개발진들이 잘 만든 정도가 아니라 유저들 자체적으로 게임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진지하게 재판에 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스테라'는 동대륙의 수도라 할 수 있다.
서대륙의 입장에서 보면 적대하는 국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기적인 무역선이 오고 갈 정도로 밀접한 항구도시다.
서아시아적인 환경과 모스크 양식을 본뜬듯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서대륙이 중세 서양인의 생활양식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면, 동대륙은 동양풍에 가깝다.
서대륙은 누이안, 엘프, 드워프인 반면에 동대륙 하리하란, 페레, 워본 등 이름에서부터 서양 판타지에 흔히 등장하는 종족과는 결이 다르다.
아키에이지에는 타 대륙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숙련도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서 긴 시간 꾸준히 배운다면 서대륙 유저가 동대륙 유저와 대화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임이 업데이트되며 망명이나 해적이 되는 등 양 대륙 유저들이 섞일 수 있는 상황이 얼마든지 생겼기 때문인데, 만약 타 대륙 언어 숙련도가 높지 않다면 문장 중간에 알 수 없는 부호가 섞이는 등, 못 알아듣는 단어가 있다는 묘사도 존재한다.
원대륙은 유저들이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후에 넓은 바다를 건너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꿈의 대륙이다.
나중엔 아예 포탈이 따로 생겨버렸지만, 처음 이 땅에 당도했을 때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다.
어지간히 캐릭터 육성에 신경 쓰지 않는 이상은 이 대륙에서 혼자 사냥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몬스터들은 높은 체력과 공격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저들의 전유물이던 스킬까지 사용했다.
하나를 잡는 동안 근처에 있던 두어 마리에 어그로가 끌려 덮쳐지면 두세 명이 모여도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즉, 아키에이지의 PVE적인 진짜 재미는 원대륙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아키에이지 세계관의 근간인 '세계의 배꼽'에 당도할 때까지 이어진다.
최초의 원정대가 당도했던 세계의 배꼽엔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그 안엔 문지기인 '키프로사'가 앉아있는데, 신의 정원 구역인 '계절로 가는 문'을 안내해 준다.
안에 들어가면 페어리들이 기다리고 있으며, 아키에이지의 가장 최근 엔드컨텐츠를 담당하는 정원 일퀘가 바로 여기에서 벌어진다.
정원의 내부는 4계절이 공존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지역엔 시간별로 굉장히 강한 힘을 가진 보스몹이 출현한다.
이곳 몬스터 자체가 좋은 아이템을 드랍해서 나도 아키에이지 플레이 타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러다 보면 넋을 놓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몽환적인 색감과 함께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이곳은 적대 유저도 함께 사용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방심하다가는 저항도 못해보고 죽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사실상 이곳이 아키에이지 서비스 종료 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새로운 지역이다.
개발진이 어떻게든 꺼져가는 게임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쓴 흔적이 남아있고 필드 컨텐츠 중에 자연스럽게 적대 유저들과 PVP를 진행한다는 게임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다.
되돌아보면 아키에이지에는 버려지는 지역이 잘 없었다.
유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컨텐츠가 없다면 지역 축제 이벤트를 열어서라도 참여율을 높였다.
그 축제 이벤트들이란 게 대부분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1년 내내 뭔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게 좋았다.
유저들이 힘을 모아 성을 건축하거나, 겉모습부터 거대한 책처럼 생긴 도서관 내부를 공략한다거나, 공중 섬에 올라가 거대한 보스몹을 쓰러뜨린다거나 하는 우리가 판타지 세계에서 꿈꾸던 것들을 구현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단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모든 지역이 우리의 추억이고 이 모든 지역에서 이룩한 업적들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다.
2013년부터 2025년 3월 5일이 된 지금까지 한순간이라도 재미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유저들과 싸우거나 던전 혹은 레이드에 참여하는게 전부가 아니다.
이 게임엔 평화롭게 여유를 갖고 누릴 수 있는 컨텐츠도 많았다.
사막의 석양 아래를 털털거리는 달구지를 타고 달리거나 집에 가구를 배치하면서 고민하는 등 이 세계의 진정한 주민으로 녹아들었던 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음 한 편을 끝으로 아키에이지 리뷰를 마치게 된다.
그리고 아키에이지의 서비스도 끝난다.
아키에이지의 속편인 아키에이지 크로니클이 얼마나 재미있게 출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12년간에 대한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다음으로 맘 붙일 게임을 슬슬 찾아봐야겠다.